2007-11-02 08:22:16
▲ 1992년 다저타운 스프링캠프에서 라소다 전 LA감독과 함께 (제공=김성근 감독)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사람들은 김성근 감독을 ‘야구의 신’이라고 부른다.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상대 감독이었던 김응룡 당시 삼성 감독이 “마치 ‘야구의 신’과 싸운 것 같다”고 한데서 시작된 호칭이다.
그러나 정작 김 감독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젔는다. “야구는 인생과 같아서 끝을 알 수 없다. 계속 배워야한다”이라는 것이 ‘야구의 신’에 대한 그의 반응이다.
괜한 겸양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야구를 더 알고 싶어한다. 엄청난 독서량도 그 때문이다. 그의 집엔 엄청난 양의 야구 관련 서적이 빼곡히 정리돼 있다. 스스로도 “수백권이 넘는 건 맞는데 다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고 할 정도다.
그의 야구를 무조건 ‘일본식’으로 단정하기 힘든 이유도 여기 있다. 솔직히 그의 야구와 메이저리그식은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몇 년 전 우연히 감독의 방을 찾았을 때 마조니 볼티모어 투수코치의 책을 놓고 연구하고 있는 모습을 본 뒤에는 생각을 바꾸게 됐다. 정답에 가깝게만 갈 수 있다면 가리는 것이 없다.
실제로 김 감독은 자신이 영향을 받은 감독으로 모리(전 세이부) 노무라(라쿠텐) 등 일본 감독들과 함께 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감독을 꼽는다.
그는 자신의 모자람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다. 눈과 귀,그리고 마음을 열어둔채 많은 것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그는 늘 그런 자세로 출발점에 선다.
삼성 감독 시절이던 1992년 김 감독은 플로리다 베로비치 다저타운으로 스프링캠프를 떠났다. 그리고는 LA 다저스로부터 각 부문 인스트럭터를 지원받아 선수들의 지도를 맡겼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인스트럭터가 오면 가장 먼저 각 훈련장을 돌며 지도 방법을 관찰했다. 어떻게 가르치는지가 주된 관심사. 그들의 방식에 자신의 노하우를 더해 보다 나은 방식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당시 수비쪽 인스트럭터를 맡은 사람인 ‘지코’라는 이름으로 정도만 기억되고 있는 쿠바계 코치였다. 김 감독은 수비 훈련을 지켜보다 큰 실망을 했다. 가장 기초적인 것만 반복했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는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거라 여겼었기에 실망은 더욱 컸다. 이후 수비쪽 훈련장은 전혀 찾지 않았다.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김 감독은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다 뜬금없이 그때 얘기를 꺼냈다. “가끔 그때 배우지 못한 걸 후회할때가 있어. 그냥 기본기만 맨날 가르치길래 별거 없다고 여겼는데 지나고 보니 거기에 길이 있었던 거야. 그때 잘 배워뒀으면 수비도 더 자신있게 가르칠 수 있을텐데... 아쉬워.”
그의 평소 지론과 닿아 있는 얘기다. 김 감독은 “무식한 것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식한데 그렇지 않은 척 하는 사람은 큰 해가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는 오만과 자만을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다.
김 감독은 야인 시절 코치 2년차이던 김용수 당시 LG 2군 투수코치에게 언더핸드 투수 조련법에 대해 조언을 구한 적도 있다. 우연히 보게 된 2군 경기서 언더핸드 우규민의 투구가 너무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묻는다고 진짜 진지하게 가르쳐줄지는 몰랐다”는 농담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지만 이후 선수들을 지도할 때 김 코치의 이론을 분명히 참고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끊임없이 진화한다. 이전까지 가르쳐왔던 것 중 틀린 것이 발견되면 곧바로 더 나은 것을 받아들인다.
김 감독이 SK 감독으로 취임한 뒤 시작된 제주 가을 캠프때 일이다. LG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노석기 전력분석팀 대리가 고개를 저으며 필자에게 다가왔다. “희한하네요. 감독님이 타자들 가르치시는게 변했어요.”
쉽게 표현하면 이전까지 김 감독은 치는쪽 팔(우타자의 왼팔)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쳤다. 2005년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2년 뒤 그 반대쪽 팔의 움직임과 팔목 사용을 좀 더 강조하는 스타일로 변신(?)해 돌아왔다.
변화의 이유를 묻기가 조금 조심스러웠다. LG 감독 시절 이미 ‘야구의 신’이라고 불렸던 감독 아닌가. 변화를 인정한다는 것은 당시가 틀렸음을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거침없이 답했다. “일본에서 승엽이를 가르치면서, 또 그쪽 코치들과 선수들, 수준높은 용병들의 치는 모습을 보며 또 새로운 걸 느끼게 됐지. 사람은 늘 변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는거야. 갖고 있는걸 버리는 건 쉽진 않아. 하지만 그걸 두려워하고 감추려하면 계속 그 자리서 멈출 수 밖에 없잖아.”
SK가 올시즌 8개구단 중 가장 많은 홈런(112개)를 때려낸 것과 절대 무관하게 볼 수 없는 진화다.
김 감독은 팀을 맡으면 일본인 코치들을 대거 기용한다. 주위에선 이를 놓고 말들이 많다. 그가 야구계에서 견제받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 코치 자리도 많지 않은 현실에서 일본에서 건너 온 코치들이 곱게 보일리 만무하다.
그러나 김 감독은 흔들리지 않는다. “세명이 모이면 그 중 한명은 내 스승이 있다고 하지 않나. 잘 보고 뭐가 다른게 있는지 발견해낼 생각이나 하라”며 소신껏 밀어부친다.
김 감독은 올시즌 일본인 코치와 보직이 겹치는 코치들도 1군에 합류시켰다. 때문에 미등록 1군 코치들이 적잖이 생겨났다. 상대가 신경전을 벌일때면 덕아웃에서 나가달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물론 김 감독은 눈 하나 깜짝 않는다. “모양새보다 잘 보고 발전하는게 먼저다. 그래야 우리가 나중에 그들에게 이길 수 있지 않겠는가.”
한국시리즈 기간 동안 박철영 SK 배터리코치는 가토 투수코치의 통역 역할을 했다. 한.미.일 3개국어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코치 입장(그는 미등록 코치다)에선 내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흔연한 낯으로 코치와 통역을 병행했다.
그는 LG 시절부터 김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사이다. 아마도 감독의 생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출처 : http://spn.edaily.co.kr/sports/newsRead.asp?sub_cd=EB21&newsid=01082406583321784&DirCode=00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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