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라 배지헌 칼럼>
얼마전 김성근 감독의 야구와 이만수 감독의 야구를 비교하는 글 한 편을 읽었다. 작심하고 쓴 흔적이 역력한 글이었다. 김성근 감독의 팬들이 격렬하게 반발하긴 했지만, 내용 가운데는 시의적절하고 새겨들을 만한 지적도 분명 있었다고 생각한다. 야구에는 결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아쉽다면 김성근 감독의 야구를 ‘100% 일본식 야구’로, 이만수 감독의 야구는 ‘미국식’으로 싸잡아 평가한 대목이었다. 물론 지면 분량의 한계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야구를 배트 동강내듯 둘로 나눠 ‘일본식은 나쁜 야구, 미국식은 지향해야 할 야구’로 구분하는 이분법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미국식 야구, ‘메이저리그식 야구’란 무엇일까? 대체 어떤 야구를 하면 ‘미국식’이란 ‘장르’에 포함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가끔 몇몇 사람에게 던져 보았지만, 그다지 시원한 대답을 들어본 적은 없다. 나조차도 메이저리그 경기를 일년에 200경기 이상 보는 ‘미국야구 팬’이지만, 저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단서가 될 만한 답변을 한 야구팬에게 들은 적은 있다. 그는 “간단하다”며 다음과 같은 야구를 미국식으로 정의했다. “훈련 적게 하고, 선수들에게 맡기고, 선발투수가 긴 이닝을 책임지고, 번트를 거의 안 대는 야구가 메이저리그식 아닌가?”
자율을 강조하는 이만수 감독의 야구는 메이저리그식 스타일로 대변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물론 저 대답을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저런 야구는 메이저리그식 야구라기보다는 메이저리그의 몇몇 감독이 하는 야구에 대한 막연한 인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무튼 앞으로 누군가가 당신에게 ‘메이저리그식 야구’나 ‘일본식 야구’를 운운하며 야구 장르 나누기를 시도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메이저리그식 야구가 뭔데요?”라고 반문해볼 것을 권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지닌 야구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협소하고 허수아비 같은 것인지를 대번에 알 수 있을 거다. 자기가 말하려는 게 뭔지도 정확하게 모르면서 대상을 규정한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각설하고. “밥 딜런은 포크 가수”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 가수”라고 정의하는 식의 폭력적인 규정 방식을 받아들여, ‘메이저리그식 야구’라는 단일한 실체가 존재한다고 신학적인 가정을 해 보자. 그런 야구가 있다면, 그 야구는 분명 미국이라는 사회와 문화적 환경 속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일 게다(‘메이저리그식 야구’라는 게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식으로 처음부터 존재했을 리는 없으니까). '미국식 야구‘라는 게 가능한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건 어떤 조건일까. 흔히 미국야구를 ‘자율야구’라고 이야기한다. 그건 미국 사회의 특성이 야구에도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 미국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개인과 독립심을 가치있게 여기는 문화 속에서 자라난다. 자율이 몸에 배어 있다. 학창시절을 학업과 함께 다양한 스포츠와 문화적 활동을 병행하며 보낸다. 스스로 알아서 성적도 챙기고, 연애도 하고, 취미활동도 병행하는 데 매우 익숙하다. 1년 365일을 학교와 학원에서 시험공부에만 매달리는 가련한 한국 학생들과는 다른 평행우주에서 사는 듯하다. 자연히 미국의 이런 문화는 프로야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결국 미국야구가 자율적으로 보이는 건 미국야구라는 장르가 그런 장르라서가 아니라, 미국의 사회 문화가 그렇게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야구가 선수들을 강제로 끌고가는 ‘노예의 야구’처럼 보인다면, 그건 비단 야구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당장 한국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회사원들이 휴일에도 얼마나 회사의 종으로 보내는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 달라져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위’일 뿐, 무작정 ‘미국야구가 자율적이니까 옳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경우다.
한국프로야구내 미국식 야구의 정서를 안착시킨 로이스터 감독(사진=연합뉴스)
마찬가지로 미국야구가 선발투수를 길게 끌고 가고 투수기용에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건 100년이 넘는 역사를 통해 그렇게 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고 승리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연간 162경기의 초장기 레이스를 휴식일도 거의 없이 치르는 강행군을 펼친다. 투수를 아껴쓰지 않으면 한 시즌을 버틸 수가 없다. 초반에 무리를 했다가는 시즌 후반 또는 포스트시즌에서 반드시 댓가를 치른다.
또 미국야구는 스포츠이기도 하지만 비즈니스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 1승의 가치가 한국프로야구만큼 절대적이지 않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필요하다면 홈경기를 상대편 구장에서 치르기도 하고, 예정에 없던 더블헤더도 하고, 순위와 상관없는 시즌 마지막 경기는 과감히 생략하기도 한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에 앞서 많은 팬들이 경기장을 찾고 중계방송을 시청해서 ‘흥행’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둔다. 한국처럼 단지 우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장, 단장, 감독을 무더기로 자르는 일은 보기 어렵다. 관중들 역시 팀의 승패 이전에 좋아하는 선수를 보고, 가족과 함께 먹고 마시며 야구를 ‘즐기기’ 위해 구장을 찾는다.
만일 미국야구가 지금보다 적은 경기수에, 정기적인 휴식일을 갖고 승패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환경 속에서 시즌을 치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때는 경기를 운용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올해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힌트가 된다. 거기에는 ‘선발투수 5이닝 원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1이닝 마무리’ 같은 건 꿈같은 얘기였다.
한 가지 더. 흔히 미국야구를 막연히 동경하는 이들이 ‘야구는 선수가 한다’고 한다. 창의적이고 개성있는 야구를 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메이저리그는 세계에서 야구를 가장 잘 하는 선수들이 모인 곳이다. 각 팀마다 150km/h를 던지는 투수와 홈런을 펑펑 쳐대는 타자들이 가득하다. 선수진이 류현진과 이대호 같은 선수로 가득하다면 감독이 굳이 개입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체격조건이나 운동능력 등이 월등하다. 투구폼이 조금 기본에서 벗어나더라도, 불안정한 자세에서 잡거나 던져도, 배트를 길게 잡고 크게 돌려도 체격과 운동능력으로 커버한다. 그와 달리 상대적으로 체격조건이 떨어지는 선수라면 보다 기본에 충실한 동작으로 야구를 해야 할 것이다. 인조잔디나 맨땅 위에서 펑고를 잡아 버릇 했으니, 몸 중앙에서 잡아 안전하게 송구하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선수들의 능력이 제한적이니 펼칠 수 있는 야구의 ‘경우의 수’에도 한계가 있다. 수가 적고 질적으로 부족한 자원들을 데리고 능력을 최대한 짜내서 어떻게든 ‘이겨야만’ 하는 실정이다. 뭔가 기존과는 다르게 해보려던 감독들도 하나같이 구단과 팬들의 성적 압박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한국야구는 이래서 안돼‘라고 하기 전에, 왜 그렇게 됐을까를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철저한 데이터에 입각한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의 야구는 대표적인 일본식 스타일로 알려져있다.(사진=연합뉴스)
한국야구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다른 말로는 한국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일 한국이 좀 더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력을 중시하고 풍요로운 사회가 된다면, 야구도 달라진 환경에 맞게 변화할 것이다. 구단이나 팬들, 선수들의 의식이 바뀌면 지나치게 승리에만 집착하는 분위기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분명히 그렇게 되는 게 옳다. 하지만 한국 사회나 야구계 전반의 문제점에 대한 성찰 없이 무작정 ‘미국야구가 옳고 김성근 야구는 틀렸다’고 매도하는 것이 과연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사회적 토양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은채 미국야구가 정답이라며 강요해서 이루어낸 변화가, 과연 얼마나 지속성을 가질 수 있을까. 김성근 감독의 SK 부임 초기 ‘쪽발이 야구’라고 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죄다 김성근 야구를 따라 하기 바빴다. 김성근 야구와 ‘다른’ 야구를 펼쳐서 이긴 팀은 2009년 KIA 정도에 불과했다. 스포츠의 세계에서 도덕 논쟁은 불필요하다. 김성근식 야구가 틀렸다면, 그 틀린 야구를 ‘옳은 야구’로 이겼으면 된다. 옳은 야구가 졌다고 불평할 참이면, 야구를 볼 게 아니라 선과 정의가 승리하는 액션영화나 보면서 혼자 즐길 일이다.
어렸을 때는 김성근 야구를 무작정 일본식 야구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솔직히 싫어했었다. 실은 잘 모르고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가진 편견에 불과했다. 김성근 야구를 일본야구라고 하는 이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대부분이 일본야구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만 갖고 있거나 미국야구를 동경하는 관점에서 나온 견해가 많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면 김성근 야구는 그냥 김성근 야구인 것 같다. 한 야구인은 “미국식 일본식 구분은 무의미하다”며 “야구에는 그냥 이기는 야구와 지는 야구, 두 종류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는 이기기 위한 야구다. 승리를 목표로 고정관념이나 불문율에 얽매이지 않는 야구, 상식을 파괴하는 야구. 굳이 견주자면 일본 야구보다는 메이저리그의 토니 라루사의 야구와 더 닮은 점이 많다.
그래서 결론은? 김성근 야구를 ‘일본야구’라며 폄하할 이유도, 이만수 감독의 야구를 ‘미국식’이라며 떠받들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야구/메이저야구의 이분법은 야구에서는 무의미할뿐더러 실체를 바라보지 못하고 편견을 갖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이만수 감독을 비롯해 젊은 감독들이 추구하는 변화에는 긍정적인 부분도 많다. 한국 야구는 물론 한국사회 전체가 나아가야 할 궁극적인 지향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 그게 ‘메이저식’이라는 이유로, ‘김성근 야구는 일본식 야구’라는 이유로 ‘옳다’고 한다면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보다는 야구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온갖 스타일의 야구가 공존하는 가운데, 경쟁하고 흡수하며 발전해 나가는 프로야구를 보고 싶다. 프로야구가 지금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 데는 2007~8년의 한국시리즈, 김성근과 김경문이라는 대조적인 사령탑이 이끄는 두 팀이 밀고 당기며 한 차원 높은 야구를 펼쳐 보인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야구에는 선악이나 정답이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출처 :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1210n04214?mid=s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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