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글 : 장원재(장원재TV 대표)

 

 

사진=조준우

 


1982년 3월 27일 토요일 동대문 운동장 야구장. 아침부터 사람들이 부산하고 기분 좋게 술렁거렸다. 특석 5000원, 내야 3000원, 외야 2000원에 판매한 입장권은 진작에 매진. 대박 흥행의 상징(?)이던 암표상들은 3배 이상의 웃돈을 더해 입장권을 되팔기도 했다. 이날은 삼성 라이온즈(대구)와 MBC 청룡(서울)이 격돌한 한국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날이다.
 
복싱, 레슬링 등 프로스포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기(球技) 종목 단체경기의 프로화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오직 운동만을 직업으로 하는 선수들을 모아 팀을 운영하고 연중(年中) 리그를 치른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절량(絶糧)과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국민적 차원의 여가(餘暇)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신군부 정권이 득세하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단군(檀君) 이래의 호황’이 펼쳐지던 시절이다. ‘선진국에서나 볼 수 있다던 프로스포츠를 우리도 할 수 있다니’라는 들뜬 마음이 사람들의 걸음을 아침부터 야구장으로 불러 모았던 것이다.
 
고교야구(高校野球)의 인기가 엄청났고, 1970년대 후반 한일은행, 제일은행, 기업은행, 농협 등 금융단 팀과 롯데, 한국화장품, 포항제철 등 기업 팀이 참가한 실업야구가 적지 않은 관중을 불러 모았지만, 프로야구 출범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 시대의 출발점이었다. 직장인 선수들이 아니라, 전업(專業) 선수들이 기량을 갈고닦아 일 년 내내 진지하게 맞붙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경기 수준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진다는 것, 그리고 우리 사회가 선수들의 잠재력과 전문성을 100% 끌어내고 활용할 수 있게 되리라는 의미였다.
 
 
프로야구 개막의 풍경들
 

1982년 3월 27일 열린 프로야구 개막 경기에서는 MBC 청룡 이종도 선수가 굿바이 만루홈런을 치면서 삼성 라이온즈를 11대7로 이겼다. 사진=조선DB

 


한국 프로야구의 출범은 일본에서도 화제였다. NHK가 개막 경기를 우주 중계했고, 일본 프로야구 시모다 커미셔너는 영어로 축하 연설을 했다. 일본의 한 관광사는 입장권을 사전예매, ‘한국 프로야구 개막전 특별관광’ 상품을 만들어 1200명의 관광단과 함께 운동장을 찾기도 했다. 그들에게 낯익은 선수도 있었다. 1962년부터 1981년까지 롯데, 세이부, 긴테쓰 등에서 활약하며 한 차례 수위타자 등극 등 일본 프로야구에서 굵은 족적을 남긴 백인천(白仁天) MBC 청룡 초대(初代) 감독 겸 선수였다.
 
가장 눈길을 끈 존재는 삼성그룹이 열정적으로 준비한 700명 ‘여공(女工) 응원단’이다. 혹시 모를 MBC의 ‘연예인 응원단 동원’에 대비, 대구 제일모직, 경산 제일합섬 여공들을 모아 열흘 전부터 하루 5시간씩 맹훈련을 했다고 한다. 버스 17대로 단체 상경한 산업전사들은 외야석 좌중간에 앉아 일사불란한 카드섹션을 보여줬다. 애국가 제창 때는 태극기를 그리고, 경기 전 공식 개막 행사 때는 참가팀 6팀의 마스코트와 팀 이름을 모두 보여줬다. 페어플레이 정신이 깃든 팬서비스였다.
 
1루 측 내야석 관중 가운데는 김응용(金應龍)도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다승(1554승)에 빛나는 명(名)감독은 프로야구 개막 당시 미국 연수 중이었다. 한 군데라도 불러주는 곳이 있을까 기대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약간 서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사적인 현장을 외면할 수 없어 자비(自費)로 귀국 비행기 편과 입장권을 사서 경기를 관전했다고 한다.
 
개막전(開幕戰) 승자는 MBC 청룡. 10회 말에 터진 이종도(李鍾道)의 드라마틱한 끝내기 만루홈런에 힘입어 11대7로 이겼다. 그래서 2021년 3월은 한국 프로야구 출범 40주년 기념월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현장을 지키는 야구인이 있다. OB, 태평양, 삼성, 해태(2군), LG, SK, 한화 사령탑을 역임한 김성근(金星根·80) 감독이다.
 
 
‘이기주의자다, 나는’
 
― 개막전 경기 당일엔 어디에 있었습니까.
 
“운동장이죠. 6개 팀 코칭스태프, 선수가 다 모여서 개막행사를 했잖아요. 우리 팀 윤동균(尹東均)이 선수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여서 대표로 선서도 했고…. 우리는 바로 다음 날 동대문에서 MBC랑 경기가 있었으니까, 대전으로 이동하지 않고 인근 숙소로 가서 경기 준비를 했습니다.”
 
김성근의 당시 직책은 OB 베어스 투수 코치다. 서울을 연고지로 원했던 두산그룹은 창단 희망 기업이 없던 충청도로 내려가는 대신 ‘3년 후 연고지 서울 이전’을 조건으로 대전에 둥지를 틀었다. 당초 3~4위권 전력(戰力)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국가대표를 다수 보유한 호화군단 삼성과 MBC 청룡 등을 제치고 원년(元年)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필자의 기억에 의하면, 우승의 서기(瑞氣)는 시즌 개막 전부터 피어올랐다. 3월 17일부터 신청서를 받은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 팬클럽 ‘OB 어린이 회원’ 모집이다. 연회비 5000원, 입장료 40% 할인에 선수단 사진이 실린 카탈로그, 점퍼, 모자, 야구공, 티셔츠, 열쇠고리, 스티커, 연필 등을 선물로 나눠준 행사는 하루 최대 2500명을 모으는 등 1만 명 이상의 어린이를 단숨에 우군(友軍)으로 끌어모았다. 상품이 동나 한동안 신규 회원을 받지 못할 정도였다. 어린이들이 입고 다니는 점퍼와 모자는 그 자체로 프로야구 홍보 수단이었고, 같은 또래 친구들의 연쇄 가입을 자극하는 ‘핫한 아이템’이었다.
 
선수단 카탈로그엔 ‘나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이라는 질문이 있었다. 김성근 코치의 답은 ‘이기주의자다, 나는’이었다.
 
“저는 타협을 안 하는 사람이니까요. 다른 사람과 상의하기보다는,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했습니다. 그것이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재일동포로서 살아가는 방식이었어요. 남에게 위로와 도움을 받는 건 인간으로서 약한 거죠. 그래서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 ‘내 생각과 의지’입니다.”
 
 
야구에 미쳐 연구하는 소년
 
김성근의 출생지는 일본 교토(京都)시 우쿄(右京)구다. 다른 재일동포들처럼 집안이 가난했다. 도시락이라야 맨밥에 간장만 뿌린 것이 전부일 정도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구들 모두 일을 나가고 없었다. 간섭도 없었지만, 돌봄도 없었다.
 
180cm라면 지금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건장한 어린이에게 일대일로 시비를 거는 학생은 없었지만, 은근한 따돌림은 많이 느꼈다.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없다. 중1 때 아버지를 잃은 사건도 자립심을 키운 계기다. 고된 노동 끝에 만취 상태로 귀가하시던 아버지는 기차선로를 지나다 열차에 받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시신이 여러 군데로 흩어져서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겨우겨우 수습한 아버지의 시신을 직접 본 일은 소년 김성근에게 아주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았다.
 
스포츠는 김성근에게 힘든 일상을 극복하는 자아실현의 수단이었다. 역전(驛前) 마라톤, 수영, 축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학교 대표로 뛰었다. 야구를 주 종목으로 삼은 것은 야구가 가장 인기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1950년대 일본 TV가 단골로 중계한 스포츠는 야구와 스모였다. 스모는 체형상 어려울 것 같아 대나무를 깎아 배트를 만들고 테니스 공을 구해 동네 공터에서 경기를 했다. 재능은 없었다. 포지션은 우익수. 자리가 남으면 끼워주던, 당시 기준으로는 있으나 마나 한, 공이 거의 가지 않아 없어도 상관없는 자리가 우익수였기 때문이다. 발도 느렸다. 고2 때 정식 경기에서 센터 앞 안타를 치고 1루에서 죽은 일도 있다. 공식 기록은 ‘중견수 앞 땅볼’이다. 그 경기에서 두 번 삼진을 당하고, 마지막 타석에서 사구를 얻은 뒤 교체되었던 일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실망하지는 않았다. 고심하기보다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 체질에 맞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빨라질 수 있는가?’를 연구했다. 육상부원에게 물으니 ‘내리막길을 뛰어보라’고 했다. 뛰다 보니 개선점이 보였다. 보폭을 줄이고 늘려가며 실험한 끝에 찾아낸 방법이다.
 
그렇다. 중학교 시절부터 김성근은 삶의 모든 시간을 야구와 연결한, ‘야구에 미쳐 야구의 모든 것을 독학으로 연구하는 소년’이었다. 집 앞 강에 나가 잡지에 나온 프로 선수들의 연속 동작 사진을 흉내 내며 돌멩이를 던지고, 집에서 학교까지 매일 6km를 뒤꿈치를 바닥에 붙이지 않고 걸었다. ‘중심 잡기’ 훈련이었다. 어쩌다 버스를 타면 자리가 나도 앉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지 않고 흔들리는 와중에 균형을 유지하는 연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일동포학생야구단
 
아르바이트로 ‘노가다’를 할 때는 지붕으로 흙을 던지며 팔의 각도를 연구했다. 김성근이 기억하는 최고의 아르바이트는 우유 배달이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동네를 돌았죠. 학비를 벌어야 했으니까. 고생이라면 고생인데, ‘이렇게 버텨서 나중에 꼭 성공해야지’ 하는 욕망이 꿈틀거리던 시절이었어요. 배달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시간을 재고 방법을 찾아 기록을 단축하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하루에 우유 8~9병을 마셨다. 밥도 국 대신 우유에 말아서 먹었더니 1년 사이에 갑자기 키가 많이 자랐다. 야구를 하기에 적합한 몸이 만들어진 것이다.
 
“가쓰라고등학교는 야구 명문고가 아닙니다. 공립학교죠. 감독이 일반 교사였는데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했고, 야구부원도 8명에 불과했습니다. 경기에 나갈 때마다 다른 운동부원 몇 명을 지원받아서 참가했어요. 제가 3번을 치기는 했지만,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전기(轉機)는 우연히 찾아왔다.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선발된 것이다. 《한국일보》 장기영(張基榮·1916~1977년) 회장의 아이디어로 1956년부터 시작한 ‘재일(在日) 학생야구단 고국방문행사’는 국내외에서 여러모로 화제를 모았던 이벤트였다. 휴전(休戰) 직후였고, 아직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이었다. 1957년에 방한한 선수단은 경무대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예방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일본 프로야구 유일의 3000안타 기록자인 장훈(張勳·82)도 있었다. 2018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장훈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한국에 처음 온 건 (한국인이라) 고시엔 대회에 나가지 못하고 한일 친선 고교야구에 출전했을 때야. 공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아리랑을 부르는데 가슴이 찡하더라고. 난 조국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어. 국적(國籍)은 종이 하나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만, 민족의 피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깐.”
 
 
북송선에 오를 뻔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을 떠나는 첫 북송선. 김성근 감독의 가족도 북송선을 탈 뻔했다. 사진=마이니치 제공

 


김성근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1959년엔 제가 고3이었는데, 투수들이 다 졸업을 하니까 1958년 가을부터 학교에서 투수를 시켰어요. 재일동포팀에 투수가 부족하니까, 인원수 맞추려고 절 뽑은 거죠. 아마 이때 뽑히지 않았다면, 야구선수로서는 바로 가라앉았겠다 싶어요.”
 
김포에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민둥산의 붉은 흙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 곳곳 먼지도 많았다. 버스를 타고 영등포구청 근처를 지나는데 길 한구석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행인(行人)들이 아무 기색도 없이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충격이었다.
 
경기는 재미있었다. 만원 관중이 뿜어내는 열기도 신세계였다. 멋진 플레이를 하면 박수가 쏟아졌다. ‘고국(故國)의 편안함’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제가 통했을 정도니까, 한국 야구 수준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죠. 좋은 선수는 많았지만 개발이 덜 된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래도 경동고 2학년이던 백인천은 발군(拔群)이었습니다. 경남고 박영길(朴永吉)도 기억에 남습니다.”
 
경남고와의 경기를 구덕야구장에서 직관한 동아대 관계자가 6명의 재일동포 선수에게 입학을 제의했다. 1960년 부산행(釜山行)은 김성근 인생의 분기점(分岐點)이다. 김성근의 홀어머니는 1959년부터 시작한 이른바 재일동포 북송(北送)사업에 지원했다. 모든 서류 절차를 마쳤고 만경봉호를 탈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도 김성근도 가족 모두가 북송선에 오를 예정이었다.
 
“일본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서 보니 여기서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더라, 한국이 살 만한 곳이더라’고 했죠. 북한에는 야구가 없어서 대한민국을 택한 겁니다.”
 
북송 교포들의 비극적 삶을 생각한다면, 야구와 김성근이 그의 가족을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日 사회인 야구팀으로 시작
 

국가대표 시절의 김성근 감독. 뒷줄 왼쪽.

 


동아대는 1960년 학번으로 입학, 가을까지 다녔다. 교수 얼굴을 본 것은 딱 한 번. 재일동포 6명이 한 방에서 기거했고, 야구선수는 야구만 하는 것이 상식이던 시절이다. 우리말도 서툴렀고, 일본에서 배운 북한 노래를 불렀다가 오해를 산 일도 있었다. 그해 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배경이다. 도일(渡日) 후 재일 대한야구협회 최태환의 도움으로 프로야구 난카이(南海) 호크스 2군 입단 테스트를 봤지만 결과는 낙방. 프로 선수들과의 수준 차를 절감했다.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를 했다고 느낄 정도였다. 같은 재일동포인 1군의 사이드암 투수 김영덕(金永德)이 많은 도움을 줬다.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삼성, 삼미 등에서 제안이 있었지만 김영덕 감독의 OB를 선택한 배경이기도 하다. 은혜를 갚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향인 교토에 있는 상호차량(相互車輛)에 취업했습니다. 석 달 정도 직장 생활을 하며 야구를 했는데, 선수 출신은 저 빼고 둘, 전용 연습장이 없어서 근무 끝나고 차고에서 운동하던 팀이었죠.”
 
일본 사회인 야구 2부리그 격인 클럽팀이었지만, 수준은 한국 실업 야구보다 높았다. 재일동포 선배 배수찬의 권유로 김성근은 다시 한국행을 결심한다. 1961년 교통부 야구단 입단이다. 1961년이라면 김성근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있다. 국가대표 투수로 뽑힌 것이다.
 
“10월에 일본 사회인 야구 우승팀인 미쓰비시 중공업 야구팀이 방한했어요. 그 팀을 상대로 잘 던져서 대표팀에 선발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26세에 선수 생활 접어
 
대표팀은 1962년 1월 1일부터 9일까지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한국, 일본, 타이완, 필리핀 등 4개국이 더블리그로 격돌하는 대회였다. 에이스는 ‘태양을 던지는 남자’ 김양중(金洋中), 좌완(左腕) 김성근의 역할은 제2 선발이었다.
 
“12월에 서울운동장에 모여 연습을 했는데, 영하 13도니까 모닥불에 공을 달궈서 썼죠. 야구공이 골프공처럼 탁탁 튀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 대표팀의 성적은 3승 3패로 타이완과 공동 준우승. 우승은 5승 1무의 일본이 차지했다. 김성근은 0대2로 패한 일본전 1차전 선발투수, 1대2로 패한 2차전에는 김양중을 구원해 5회부터 마운드에 올랐다. 2차전 한국 팀의 득점은 8회 초 2사 후 김성근의 단타에 이은 백인천의 3루타가 터진 결과다. 총 12경기에서 터진 홈런은 딱 한 개. 주인공은 대회 마지막 날 한국과 필리핀의 경기에서 4회 투런홈런을 날린 백인천이다.
 
“백인천 선수는 재능도 뛰어났지만,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일본한테 3루타 치고, 필리핀한테 홈런을 치니까 스카우트들이 주목을 했지요.”
 

기억나는 또 다른 대표팀 동료는 1루수 김응용이다. 최고의 타자였고, 연습량이 어마어마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2년, 배수찬과 함께 팀을 옮겼다. 기업은행 창단 멤버로 가서 1968년까지 활약했다. 1963년에는 인천시청을 상대로 볼넷 하나만 내준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실업야구가 기록을 시작한 1964년 성적은 20승 5패. 선수로서 최고의 한 해를 보냈지만 9경기 완투 등, 관리를 받지 못해 투수 생명이 끝났다. 던지라면 던지고, 팔꿈치와 어깨 통증을 우수 선수의 훈장처럼 여기던 시절이다. 1965년부터 타자로 전향한 까닭이다. 1루에서 포수까지도 공을 던질 수 없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만 스물여섯에 선수 생활을 접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에요. 선수 생활을 오래 했으면 지도자 생활이 단명으로 끝났을 겁니다.”
 
 
솔선수범

 

평생의 라이벌 김성근과 김응용. 사진=뉴시스

 


1964년 말 영구 귀국을 결심했다. 한일 국교 수립 전이라, 가족과 영영 이별할 수도 있다는 각오로 던진 인생의 승부수다. 은퇴 후에는 행원으로 근무했다. 한국어가 서툴러 일이 힘들었다. 서류를 잘못 읽고, 도장만 찍는 일상이 이어졌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마산 출신 이창현 기업은행 감사가 길을 터줬다. 김성근을 마산지점으로 발령했다. 자신의 모교인 마산상고 야구부 감독으로 일할 수 있게 편의를 봐준 것이다. 1969년의 일이다. 갈현동 신혼집을 팔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훈련의 강도는 높았다. 선수들이 쓰러지면 양동이로 물을 끼얹어 일으켜 세웠다. 의욕은 높고, 지도 방법은 몰랐던 초보 감독의 실수담이다. 그래도 선수들은 반발하지 않았다. 부족한 야구부 예산에도 아랑곳 않고 오히려 사비(私費)를 털어 식비, 목욕비를 대는 젊은 감독의 열정(熱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적은 별무(別無)에 집 판 돈만 없어졌다. 이듬해, 다시 서울로 와 기업은행 투수 코치(1970~1971년)를 거쳐 감독(1972~1975년)에 올랐다. 당시 한일은행 감독이 김성근의 영원한 라이벌 김응용이다.
 
솔선수범(率先垂範)은 그때부터의 생활신조다. 선수들과 남산을 함께 뛰었고, 1973년 일본 관서지역 우승 팀 내한 경기 때는 삭발(削髮) 투혼으로 선수단을 독려했다. 아침에 숙소 앞 이발소에서 머리를 잘랐더니 점심때 선수단 전원이 머리를 깎고 나타났다. 기업은행은 다음 대회에서 우승했다. 1975년 6월 21일부터 서울에서 열린 제1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는 코치로 참가, 펑고를 전담하며 첫 무패 우승(7승 1무)의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600만 불의 사나이’
 
실업야구 한국화장품(1976년 11월 창단) 감독 부임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충암고에서 ‘도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한동안 피해 다녔는데, ‘가족’을 생각하라며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자녀 학비 면제, 학교 매점 운영권 제공에 계약금 500만원. 기업은행 대리 월급이 15만원 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600만 불의 사나이’.
 
충암고 감독 부임 직후, 선수를 찾으러 다니는데 대구 대건고등학교가 야구부를 해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건고 교장선생님의 ‘이적(移籍) 조건’을 수용, 선수 18명을 모두 충암고로 전학시켰다. 양측 학교의 사정을 조율하기 위해 하루에 대구를 두 번 왕복한 날도 있었다. 이때의 제자 중 하나가 훗날 SK, KIA, KT의 감독을 역임하는 조범현(曺凡鉉)이다.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였죠. 그런데 사인 플레이를 제대로 하더라고. 그래서 포수로 돌렸습니다. 포수를 하면서도 감독의 사인을 다 소화해서, 제가 작전을 내고 감독을 하기가 편했어요. 실업야구 선수들보다도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충암고 시절 최고의 에피소드는 황금사자기 8강전이다. 감독 생활 중 딱 세 번 눈물을 흘렸는데 그 첫 번째 경우다. 기세봉의 노히트 노런 호투로 최강 신일고를 상대로 2대0 리드.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 특기자로 대학 진학이 가능하던 시절이다. 9회 말 2사 후 신일고 김남수의 드라마틱한 끝내기 역전 3점 홈런. 인코스로 낮게 파고든 승부구를 김남수는 다소 변칙적인 어퍼스윙으로 걷어 올렸다.
 
충암고 선수들은 망연자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응암동 학교까지 돌아오는 야구단 버스는 영구차 분위기였다. ‘야구 안 한다’는 선수들을 데리고 계곡으로 야유회도 가고 사비를 털어 새 유니폼도 맞춰줬다. 충암고는 한 달 뒤 열린 봉황대기 고교야구 8강전에서 신일고를 다시 만나 ‘복수’에 성공했다. 9회 말 이호헌 해설자는 “지금 신일고 한동화(韓東和) 감독의 심정은 ‘꿈이여 다시 한 번’ 아닐까요”라는 잊을 수 없는 멘트를 날리기도 했다. 충암은 역시 창단 첫 우승을 노리던 광주 진흥고를 5대0으로 물리치고 사상 처음으로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더욱 열심히 훈련한 결과였다. 신일고에 역전패한 후 ‘우리 대학 우째 가노’ 하며 통곡하던 조범현은 봉황기 MVP로 고교 시절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연세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졸업생을 다 진학시키기 위해 인하대 진학을 부탁했다.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
 
 
‘김성근 순한 맛 버전’ 조범현

 

 

조범현 감독. 사진=조선DB

 


OB 창단 멤버였던 조범현은 훗날 ‘조갈량’으로 불리는 탁월한 지도자가 된다. 그가 KT 창단 감독으로 부임할 때 “어떤 분이냐?”는 모 선수의 질문에 두 감독을 모두 겪은 고참 선수가 “김성근 감독님 순한 맛 버전”이라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감독 생활 첫해이던 2003년, 조범현은 SK 와이번스를 한국 시리즈로 이끌었다. 결과는 7차전까지 가는 격전 끝에 김재박(金在博) 감독의 현대 유니콘스에 3승 4패로 지며 준우승. 의연하게 패장(敗將) 인터뷰에 임하던 조범현은 “김성근 야구가 2등만 한다고 해서, 김성근 야구도 우승할 수 있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까지 말하다 갑자기 흐느껴 기자회견장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2007, 2008, 2011년 팀을 우승시키며 김성근이 ‘SK 왕조(王朝)의 신화’를 쓰기 한참 전의 일이다.
 
조범현은 자기의 야구를 ‘김성근 야구’라고 스스럼없이 밝히는 인물이다. 스승과 제자는 2009년 한국시리즈 때 정상에서 만났다. 결과는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을 앞세운 KIA 조범현의 4승 3패 우승. 7차전 날 아침 “범현이도 우리 아들이니까 지더라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집을 나선 김성근은 경기 후 최선을 다한 선수들이 안쓰러워 세 번째 눈물을 흘렸다.
 
조범현은 우승 직후 SK 더그아웃을 찾아 스승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패장인 스승이 승장(勝將)인 제자를 격려하는 표정과 몸짓은 필자가 기억하는 한국 야구 40년 역대 최고의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두 번째 눈물은 LG 감독이던 2002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 9대6으로 앞서던 LG가 9회 말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 다음 타자 마해영에게 결승 홈런을 허용하며 허무하게 패했을 때다.
 
 
소프트뱅크 코치 고문
 
물론 세 번의 눈물 속에 깨달음도 있었다. 그 전에는 이기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면, 일본 롯데 마린스 순회코치 시절(2005~2006년), 보비 밸런타인 감독으로부터 ‘넓은 시야’를 배웠다. 선수와 팀을 만드는 것 말고도, 감독은 매스컴을 상대하고 관중 동원 등 비즈니스에도 통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2011~2014년) 시절엔 1년에 딱 사흘만 훈련을 쉬었다. 절실함이 어마어마한 결과를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한 시간이다. 이걸 살리지 못하면 사회적인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22명을 프로에 보낸 일은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다.
 
김성근의 현 직책은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고문이다. 1963년 김성근이 2군 테스트를 봤던 바로 그 구단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화 이글스 감독을 그만두고 야인(野人)으로 지낼 때 “야구에 대한 열정과 지혜를 빌리고 싶다”며 고마운 제안을 해줬다. 영어 명칭은 Coach Advisor, 감독에게 조언을 건네는 자리다. 2018년부터 네 시즌째 활동 중인데, 구도 기미야스(工藤公康) 감독이 “야구에 대해서 느낀 점을 언제든지 바로 얘기해달라”고 청했다.
 
김성근의 조언을 경기 중에 바로 시행한 일도 여러 번이다. 2022년부터 팀 지휘를 맡은 신임 후지모토 히로시(藤本博史) 감독은 “봄 캠프 전에 팀에 꼭 합류해달라”고 부탁했다. 팀의 전체적인 움직임, 분위기, 훈련 일정 등에 대해 종합적인 조언을 해달라는 뜻이다.
 
2017년부터 4년 연속 우승하며 신왕조(新王朝)를 세웠지만, 2021년 시즌엔 성적이 부진했다. 부상자가 많았고, 코로나19로 인한 용병 수급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새로워지지 않았기에 생긴 문제다. 금년 시즌엔 그 점을 해결하고, 팀원 모두가 ‘경기에서 이기자’는 각오로 스프링캠프를 준비할 것이다. 한화 시절 가깝게 지낸 전설적인 홈런왕 오 사다하루(王貞治) 소프트뱅크 회장과 거의 모든 홈경기를 보며 그동안 몰랐던 많은 것을 배운다. 밸런타인도, 오 사다하루도 모두 야구계의 신화적 인물이지만, 아직도 자기들이 모르는 것을 흡수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모르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손정의(孫正義) 구단주는 ‘무조건 강해지라’며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만난 적은 없지만, 어마어마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한다.
 
 
一球二無
 

 


묻고 싶은 질문이 산더미 같았지만, 어느새 약속한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9회 말에 등판한 마무리 투수의 심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 좋은 감독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사명감을 가지고 좋은 결과를 내고, 선수에게 대가를 돌려주는 감독입니다. 한계를 넘어서면 선수 자신이 그걸 가장 먼저 압니다. ‘나를 위해서 감독, 코치가 도와주시는구나’라는 느낌이 생기죠. 사명감이라는 건, 저하고 만났던 선수들이 20년, 30년 후에 과거를 돌아봤을 때 ‘얻어온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 좋은 선수는 어떻게 만드나요.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도록 도와줍니다. 한계를 못 넘으면 어느 시점에서 더 올라가지 못해요. 한계를 넘으면 그 프로세스가 자기 것이 됩니다. 어렵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앞길이 없는 거죠. ‘힘들다’는 건 아직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관리 속에 자율(自律)이 있고 자율 속에 관리가 있는데, 자율은 어느 정도 정상에 올라간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 평소에 즐겨 말씀하신다는 ‘일구이무(一球二無)’는 어떤 뜻입니까.
 
“야구도 인생도 3번 정도 찬스가 옵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온 걸 모르거나 기회를 못 잡아요. ‘지금 이 공을 놓치면 끝’입니다. 이 공을 놓치면 두 번째는 없어요.”
 
김성근의 별명은 ‘잠자리 눈깔’이다. ‘관중석에서도 투수들 그립이 보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노(老) 감독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봐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생이나 야구나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 식이 아닌, ‘왜 졌나, 왜 안 풀렸나’를 연구하면 해결책이 보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단서들이 흘러가고, 관심이 있으면 답이 보이지 않나 싶어요. 갈림길에선 어려운 쪽을 택하세요. 그것이 투쟁이고 새로운 길을 만듭니다.”
 
아직도 야구장에 가면 가슴이 설렌다는 거장(巨匠)에게도 바꾸고 싶은 순간이 있을까?
 
“저는 구단과 많이 싸운 감독이죠. 제 청년 시절에는 야구 선수를 ‘무식한 집단, 거친 사람들’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야구인도 전문 인력이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는데, 지금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 같습니다. 상대방에게도 길을 내주면서 일을 해야 했는데, 너무 내 길만 가려고 한 것은 아닌가 반성합니다.”

 

 

출처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2203100043#top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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