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LG 트윈스를 사랑했던 남자, 이상훈-<3>
<13년 만에 시구자로 잠실 마운드에 올랐던 이상훈. 그런 선배와 뜨겁게 포옹하는 유강남. 보고 또 봐도 감동을 자아내는 명장면이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2016년 10월 8일 잠실구장에서는 경기 전 특별한 시구 및 시타(노찬엽) 행사가 열렸다. LG 불펜에서 클래식 유니폼을 입은 레전드의 등장에 관중들은 박수와 함성으로 반가움을 나타냈다. 얼마만의 잠실구장 마운드인가. 얼마 만에 보는 이상훈과 LG 팬들의 재회인가. 2만60000석을 가득 채운 팬들은 목 놓아 외쳤다. “이상훈! 이상훈!”
이상훈은 1루수 정성훈에게 깜짝 견제구를 던졌다. 그리고 모자를 벗고 관중들에게 인사를 전한 그의 눈은 이미 물기를 가득 머금은 상태였다. 그날은 LG와 두산의 정규시즌 최종전이었고, 시즌 내내 2군에 머물렀던 이병규가 모처럼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날이었다. 포수 유강남의 미트 중심에 정확하게 공을 내리 꽂은 이상훈. 선수 시절의 긴머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역동적인 투구폼은 여전했다. 은퇴식을 갖지 못했던 이상훈에게 그날의 시구는 시구 이상의 의미와 감동을 안겨줬다.
이상훈이 말하는 고양 원더스와 김경문 감독-<1>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이상훈이 남몰래 흘린 눈물-<2>에 이어서
2015년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후 이듬해 LG 피칭 아카데미 원장으로 팀을 옮겼습니다. 당시 두산에서 재계약을 원했던 걸로 아는데 그걸 고사하고 LG로 향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LG였으니까요. 다른 팀이 불렀다면 안 갔을 겁니다. LG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일반 투수 코치가 아닌 피칭 아카데미 원장이라는 생소한 타이틀이었습니다.
“그래서 갔어요. 없는 보직을 만들어서 제안한 걸 알았기 때문에요. 당시 LG 1,2군, 육성군 파트의 투수 코치는 다 차 있는 상태였어요. 피칭 아카데미를 신설해서 원장이라는 타이틀을 제시하며 부르는데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LG에서 선수 생활을 했었고, LG의 녹을 많이 먹었던 사람이고, 여전히 대외적으로는 LG 색깔이 강한 사람이잖아요. 마치 자석처럼 이끌려갔던 것 같아요.”
두산과 정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겠네요.
“죄송한 마음이 컸습니다. 고양 원더스가 해체된 후 실직자 신세의 제게 프로 코치 자리를 제시해준 팀이었으니까요. 다행히 김태룡 단장님과 김태형 감독님이 잘 이해해 주시더라고요. 가서 잘됐으면 좋겠다는 덕담도 남겨주셨고요.”
정말 우여곡절 끝의 LG 재입성이었습니다. 2010년 4월 LG 구단과 한바탕 소란이 일었어요. 2009년 구단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두고 서로 상반된 시각 차이를 나타내는 바람에 구단 홈페이지인 ‘쌍둥이 마당’이 후끈 달아올랐었죠.
“LG로부터 코치직을 제안받았다고 생각하고 모든 걸 정리한 다음 연락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끝내 연락이 오지 않아 진실 공방이 펼쳐졌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구단 게시판에 그런 글을 올린 건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선수들은 구단을 상대로 항상 을의 입장인데, 운동을 그만둔 후에도 을이 돼야 하고, 있었던 일도 관점의 차이라며 없는 일로 만드는 처사를 두고 볼 수가 없었어요. 이광환 감독님이 가장 크게 걱정하셨어요. 상훈이가 왜 저러느냐면서. 그때 주위에서는 그 글들로 인해 저와 야구계랑은 완전히 끝났다고 봤어요. 미디어에서도 그런 시각을 갖고 있었고요.”
저도 그 글들을 챙겨 봤습니다. 마치 도마 위의 생선이 팔딱팔딱 뛰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역시 이상훈답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 이미지가 반항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건 제가 반항을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옳지 못한 일에 대해 의견 제시하는 걸 구단이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일련의 일들을 겪었던 사람이 투수 코치도 아닌 피칭 아카데미 원장직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이전 구단 관계자와 문제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LG를 싫어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죽을 때까지 LG 출신 이상훈은 함께 하는 거니까 영입 제안을 거절 못했던 거죠.”
<이상훈은 끊고 맺음이 분명하다. 대충, 적당히는 통하지 않는다. 때로는 이런 부분이 그를 오해의 시선에 가두기도 한다. 은퇴하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야구의 흐름도 변했고, 그도 변화를 이뤘지만 변하지 않는 건 한 가지. 바로 LG에 대한 질긴 애정이다.(사진=이영미)>
피칭 아카데미는 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이었나요.
“이전의 고양, 두산과는 또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고양은 프로 입단을 위해 선수를 성장시켰던 반면에 두산에서는 1군 선수들 자리가 비었을 때 2군 선수들 중 1군으로 올려 보낼 만한 선수를, 그리고 1군에서 버텨낼 만한 선수를 만드는 게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피칭 아카데미는 앞선 순번에 지명 받은 선수들을 대상으로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예전에는 신인 지명자들이 1군에서 활약했지만 지금은 1차 1번 지명자도 잘 못 버텨요. 그만큼 프로 1군 선수들의 기량이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이죠. 2군도 실력 향상이 많이 됐어요. 제가 야구할 때의 2군 수준과는 큰 차이가 있을 만큼 기술적으로 질적 성장을 이뤘습니다. 그래서 피칭 아카데미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앞 순위로 지명된 신인 선수들, 제대해서 몸을 만들어야 하는 선수들이 부상 없는 몸으로 건강한 공을 던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습니다.”
피칭 아카데미를 어떻게 운영했는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어린 선수들이 건강한 몸으로 1년 동안 공을 던지려면 경쟁 상태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피칭 아카데미에 온 선수들은 전지훈련에 참가하지 못하게 했어요. 전지훈련지는 감독, 코칭스태프의 눈에 들려고 선수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펼칩니다. 몸이 아파도 참고 던지는 선수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환경인 거죠. 그래서 유망주들은 전훈 참가보다 이천 실내훈련장에서 트레이닝을 받으며 하프 피칭 위주의 훈련을 이어갔습니다. 2군 선수들이 전지훈련에서 돌아와 야수 파트에서 육성군이 만들어지면 그때부터 게임을 잡고 실전 경기에 투입시켰고요. 3군, 육성군들과의 경기를 통해 투구 감각이 다져지면 2군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단 조건이 있었어요. 2군 어느 경기, 어느 순서라도 꼭 실전 투구 경험을 쌓게 해달라고 2군 코칭스태프에게 특별 부탁했습니다. 피칭 아카데미에서 나가면 선수들은 바로 전쟁터에 투입됩니다. 피칭 아카데미에서는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고요.”
김대현, 임찬규, 배재준 등이 피칭 아카데미를 거쳤고, 1, 2군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어요.
“어느 날 야구 경기를 보는데 TV에서 갑자기 ‘이상훈 키즈’라며 김대현, 임찬규, 배재준 이름을 거론하더라고요. 속으로 ‘이 녀석들이 올라가서 확확 당기고 있으니 덕분에 내 이름 세 글자가 TV에 나오는 구나’ 싶었습니다. 1년 동안 피칭 아카데미에서 고생 많이 했던 선수들이라 그들의 성장 과정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보람을 느꼈느냐고 묻자) 그럼요. 보람을 느낄 수밖에요. 사실 2군 선수가 1군에 올라가 붙박이 선수로 자리 잡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피칭 아카데미를 떠난 선수들이 1,2군에서 붙박이 선수로 성장해주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3,4년 더 나아가 4,5년이 지나 1군 마운드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선수로 키우는 것. 피칭 아카데미 원장, 이상훈의 신념이자 철학이었다.
피칭 아카데미가 3시즌 동안 진행되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LG를 나오게 됐고요.
“작년 시즌 후반기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1군 성적이 좋지 않으니 아카데미까지 여파가 올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기사를 통해 피칭 아카데미를 없애겠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제가 학원 원장인데 학원이 폐지되는 걸 기사로 알게 된 것이죠. 팀을 이끄는 수장이 바뀌면 정책에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인 것이죠. 그래도 직접 얘기해주기를 바랐습니다.”
LG에서는 2군 코치직을 제안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월급 받는 것만 생각한다면 남았어야 했겠죠. 제 마음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어요. 제가 SK에서 시즌 중에 은퇴를 했잖아요. LG를 나온 것도 그때와 비슷한 이유였습니다. 여기서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면 투수들한테 피해가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고양과 두산, 그리고 피칭 아카데미에서 했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선수들을 대해야 하는데 그 마음이 생기지 않고 돈 받기 위해 남아 있는 거라면 제 자신한테 창피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야구선수로 성공하려고 온몸을 던져 야구하는 선수들한테도 못할 짓이었던 거죠. LG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그만둘 수 있었어요. 애정이 없었다면 제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며 돈 받고 일을 했겠죠.”
이상훈은 LG를 나온 이후 새로 취임한 이규홍 대표이사, 류중일 감독, 차명석 단장한테 난을 보냈다고 한다. 두산을 떠날 때도 그는 자신에게 기회를 준 김승영 전 사장과 김태룡 단장, 김태형 감독에게 각각 난을 보낸 바 있다. 어떤 연유로 팀을 나오게 됐든 자신이 몸담았던 팀에 예의를 표하고 싶었다고 한다.
2016년 10월 8일,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기념비적인 행사가 있었어요. 은퇴 후 처음으로 잠실 마운드에 올라 시구한 장면이 LG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저도 잊지 못하는 순간입니다. 원래 시구자는 귀빈석에 있다가 3루 더그아웃 옆에서 나오기 마련인데 그 동선을 제가 다 깼어요. 각본대로 하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요. 동선을 깨고 혼자 LG 불펜으로 향했더니 난리가 났었죠. 그날 선발이 임찬규였어요. 찬규가 몸을 풀 때까지 기다렸다가 불펜이 비었을 때 공을 던지며 저도 몸을 풀었습니다. 순서가 돼서 마운드로 뛰어 올라가는데 1루에 있던 정성훈이 시야에 들어오더라고요. 아, 견제해주기를 바라는구나 싶어서 시구 전에 1루로 공을 던졌던 겁니다. 정성훈이었기 때문에 그런 견제가 가능했어요. 그 경기는 이병규의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더 의미가 컸고요. 시구마치고 내려가는데 후배들이 기립 박수를 쳐주더라고요.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가끔은 너무 솔직해서 손해 본다고 생각하진 않나요?
“감추는 것도 있어요. 사회 생활하는 사람이 100% 솔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전 과감하게는 살아도 잔머리 쓰는 걸 잘 못해요. 얼마든지 언론 플레이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죄를 짓는 것 같고 불편해지더라고요. 프로는 보이는 이미지도 중요하잖아요. 그걸 제대로 못한 건 제 잘못인 것 같아요. 프로는 자신을 알리는데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전 그걸 못했으니까요. 야구는 ‘행위 예술’입니다. 예술하는 사람은 고집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타협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죠. 그래도 선수는 고집이 있어야 해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은 진짜 좋은 사람, 좋은 선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 어느 시기로 돌아가고 싶을까요.
“안 돌아가도 돼요(웃음). 이미 많은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게 훨씬 커요. 한국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만끽하기도 했고,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바닥을 친 적도 있었어요. 그 모든 것들이 제 야구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없어요. 참, 이건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떤 내용인가요?
“이순철 (전)감독(SBS 해설위원)님과의 관계에 대해서요. 제가 SK로 트레이드 될 때 이런저런 소문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당시 이순철 감독님과의 갈등설이 확대 해석된 부분이 있었어요. 저도, 감독님도 오해를 했을 수도 있고요. 은퇴하고 나서 감독님을 뵙지 못하다 고양 원더스가 해체되었을 때 우연한 자리에서 인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감독님이 당시 트레이드가 이뤄진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셨어요. 감독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말씀하셨고요.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인데 지금도 종종 그 일로 인해 감독님이 비난받는 게 안타까웠어요. 더 이상 감독님에 대해 오해의 시선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고요.”
이상훈은 LG 트윈스의 상징인 유광 점퍼에 대해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유광보다는 무광 점퍼가 더 낫지 않을까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의미로.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말이죠. 너무 빛나는 것만 보지 말고 바닥에서 흙도 묻히고 거름도 주면서 잘 다듬어서 다시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수장이 바뀌면 팀 체제도 변화를 이룹니다. 분명한 비전과 목표를 제시했으면 그 방향이 중간에 변질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변질이 되면 행위하는 선수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이상훈은 은퇴식을 갖지 못했다. 아쉬움이 없느냐고 묻자,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시구했잖아요. 그러면 된 거지. 구단에서 시구를 제안했지만 전 팬들을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잠실야구장에서 팬들을 만나고 싶어서. 그 경험이면 충분해요.”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이상훈이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을 맡게 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그가 해설위원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그 소감을 듣고 싶어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걱정을 앞세웠다.
“여전히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건 유니폼 입고 움직이는 건데 넥타이 매고 그라운드가 아닌 중계석에 앉아 있다는 기분이 어떨지 솔직히 상상조차 안 됩니다. 그러나 항상 그랬듯이 제게 일을 제안한 건 MBC스포츠플러스가 제일 먼저였고,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받아들였습니다. 생소하고 어려운 분야라 분명 시행착오를 겪게 될 거예요. 나름 고민 많이 해서 결정했어요. 고민했던 시간들이 해설에 잘 녹아들었으면 좋겠어요. 해설은 단순하게 하고 싶어요. 최대한 단순하게.”
마지막 질문입니다. 해설위원으로 LG 경기를 맡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에이, 이런 질문은 이 기자님답지 않은 너무 식상한 질문인데요?(웃음) 그 답은 1년 후로 미루겠습니다.”
<길들여지지도, 길들일 수도 없는 야생마 이상훈. LG 팬들한테 그는 ‘옛사랑’이 아닌 ‘영원한 사랑’이다. 그걸 알기에 이상훈도 LG를 놓지 못한다. 누구보다 트윈스를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출처 :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80&aid=000000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