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어오기/이영미 기자

이상훈이 말하는 고양 원더스와 김경문 감독-<1>

개살구 2019. 2. 13. 16:02

<서울대학교 내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 만난 이상훈.(사진=이영미)>



여전히 이상훈의 이름 앞에는 ‘LG 트윈스의 영원한 레전드’ ‘야생마’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야구인 이상훈을 가장 잘 드러낸 서사들이다. 2004년 선수 생활에서 은퇴 후 음악과 개인 사업에 몰두했던 그가 2012년 11월, 고양 원더스 투수 코치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 누구도 선뜻 ‘지도자 이상훈’의 가치를 재단하기 어려웠다. 인내와 기다림을 요구하는 지도자 생활에 그가 얼마나 부합해갈 수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자 이상훈은 고양 원더스가 해체돼 야구장 문을 닫을 때까지 투수 코치의 역할을 수행했고, 이후 두산 베어스 2군 코치를 거쳐 2015년 겨울, LG 트윈스의 피칭 아카데미 초대 원장을 맡게 되면서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그동안 이상훈은 LG 신예 투수 육성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여러 선수들을 성장시켰다. 그러나 피칭 아카데미는 2018년 11월 문을 닫았다. 육성 시스템의 전면 개편을 선언한 LG가 트랙맨을 통해 효과적인 육성 시스템 구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피칭 아카데미는 폐지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이후 이상훈은 사표를 제출했고, 팀을 나왔다. 다시 트윈스와 이별한 셈이다.


1993년 LG에 입단한 이상훈은 이듬해 18승을 올리며 LG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고, 1995년에는 20승(5패)을 채우고 2년 연속 다승왕을 차지했다. 미디어를 통해 비춰진 이미지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지만 선수 이상훈은 두세 경기 연투 후에도 감독이 던지라고 하면 마운드에 오르는 걸 거부하지 않는 책임감 강한 선수였다.


이상훈과의 인터뷰는 총 3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인터뷰 내용은 선수 시절보다 지도자 생활에 더 초점을 맞췄다.


이렇게 만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전에도 몇 차례 연락드렸는데 전화를 받지 않더라고요. 


“어떤 번호로 하신 거예요? 제가 고양 원더스 그만둔 다음 전화번호를 변경했거든요. 아마 이전 번호로 하셨나 봐요. 제가 전화를 안 받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070 번호까지 다 받아요. 무슨 죄를 졌다고 전화를 피하겠어요.”


아, 이전 번호였나 봐요. 그런데 070 전화까지 받는다는 게 의외인데요?


“대부분이 광고성 전화지만 이전에는 미국에서 인터넷 전화로 070 번호를 사용했거든요. 그래서 전화를 받았던 거죠. 오랜만에 인터뷰하니까 이전에 한 신문사에서 인터뷰이가 아닌 인터뷰어가 돼 사람들을 만났던 일들이 떠오르네요.”


기억납니다. <일간스포츠>에서 진행됐던 ‘이상훈의 네버엔딩 인터뷰’였죠? 처음에 그 인터뷰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매우 신선한 아이템이었거든요. 


“다들 그렇게 보시더라고요. 언론과 친하지 않고 기자들을 기피하는 제가 객원 기자 신분으로 인터뷰를 진행한다면서요. 재미있게 일했어요. 새로운 분야였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좋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인생 공부도 했습니다. 인터뷰 섭외는 제가 직접 했어요.”


섭외를 직접했다고요? 얼핏 기억나는 인물로 이봉주, 김성근, 김재박, 이광환 감독, 안재욱, 박중훈, 하승진, 김구라 등 인터뷰 대상자가 정말 다양했었는데요. 


“담당 기자한테 인터뷰 대상자 전화번호를 얻지 않고 제가 직접 여기저기 전화 돌리고 수소문해서 연락처를 알아냈어요. 선수한테 직접 전화한 적도 있었고, 연예인들은 매니저에게 연락을 했었죠.”


전화해서 자신에 대해 어떻게 소개했는지 궁금하네요(웃음).


“안녕하세요. 옛날에 머리 기르고 야구했던 이상훈입니다. 일간스포츠에서 이상훈의 네버엔딩이란 코너를 진행 중인데 인터뷰 좀 부탁드린다고 설명했습니다. 인터뷰하기 전 질문지를 요구할 때는 직접 질문지를 보내기도 했었고요.”


기사도 직접 쓰셨나요?


“그건 전문가인 담당 기자가 작성했고 출고되기 전 제가 꼭 확인하고 내보냈어요. 괜히 인터뷰이한테 누가 되면 안 되는 거니까. 그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인터뷰어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요. 비슷한 질문이라고 해도 어떠한 눈빛과 태도로 질문하는지가 중요하더라고요.”



<은퇴 후 록밴드 'WHAT'을 이끌었던 이상훈.>



선수 이상훈과 은퇴 후의 이상훈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전 선수 때나 은퇴한 후에나 다 똑같다고 생각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는 있을 것 같아요.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야구 외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도 존재했잖아요. 제가 분명한 걸 좋아하다보니 상대한테도 그런 방식을 요구했던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고요.”


2004년 6월, LG가 아닌 SK에서 공식 은퇴를 발표한 후 한동안 야인으로 생활했습니다. 록밴드 활동도 하고 미용실을 운영하기도 했었죠. 그러다 다시 야구장에 나타난 건 독립야구단인 고양 원더스(해체) 투수 코치 신분이었습니다. 2012년 11월 6일, 스포츠 뉴스에 여전히 긴 머리를 한 채 김성근 감독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성근 감독님께서 창단 당시에도 연락을 주셨어요. 그때는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있어 금세 정리하고 팀에 합류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많이 아쉬웠는데 이듬해 다시 연락해주시더라고요. 그때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제안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오랫동안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팀이 아닌 독립구단이었어요. 


“이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고양 원더스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절 내보내지 않았다면 전 여전히 그곳에서 코치 생활을 했을 겁니다.”


만약 프로팀에서 ‘러브콜’이 있었다고 해도요?


“네. 프로는 10개 팀이 있지만 당시의 원더스는 유일한 독립구단이었어요. 딱 한 번의 찬스만 있는 것이죠. 프로는 제가 아니더라도 기회를 받을 수 있는 지도자들이 많지만 원더스에는 제가 꼭 필요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부분에 더 관심을 갖더라고요.”


어떤 관심이요?


“저랑 김성근 감독님이랑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웃음).”


그렇죠. 두 분 다 강성 이미지라서요. 


“전 보기와 달리 감독님 지시에 잘 따르는 편입니다. 던지라면 던지고, 쉬라면 쉬고. 무리한 등판에도 마운드에 올라가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묵묵히 따랐습니다. 그게 선수의 의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선수 시절 김성근 감독님 밑에서 야구도 했는데 뭐가 어렵겠어요. 감독님도 제가 책임감 없이 반항만 하는 선수였다면 코치로 부르시지 않았겠죠.”


은퇴 후 처음 경험하는 지도자 생활이었습니다. 또 프로가 아닌 독립구단이라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제가 항상 엘리트 코스만 밟은 줄 알지만 저도 다양한 형태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렸을 때 찢어진 가난도 경험했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미국 야구 속으로 들어가 부딪치고 넘어지면서 야구를 날 것 그대로 접한 적도 있었습니다. LG 입단 후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반복되기도 했었죠. 그런 삶이 세상에서 가장 간절했던,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선수들과의 만남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원더스 투수들이 27명이었어요. 모두 프로 입단을 희망하는 선수들이었습니다. 프로에 가려면 경기에 자주 나가야 해요. 그러나 독립구단의 경기 수는 제한적이잖아요. 선수들은 많고 경기 수는 부족하고. 불펜에서 연습 투구만 하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선수들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연습은 죽어라 하는데 기회를 얻지 못하니까. 그런 시간들이 계속 되면 선수는 자신감을 잃기 마련입니다. ‘난 안되는 건가?’ ‘계속 게임에 나가지 못하면 누가 나란 선수를 알아줄까?’ ‘그냥 야구 그만둘까?’하는 상념들이 선수들을 괴롭힙니다. 그런 고민에 빠진 선수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제 방이에요.”


코치실을 의미하는 겁니까?


“네. 한 번은 투수 한 명이 훈련 전에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오더라고요. 딱 얼굴을 보니까 새벽까지 술을 마신 듯 했어요. 옷차림도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었고요. 그 선수를 보고 제가 물었습니다. ‘왜? 야구 그만두게?’라고. 아침에 그 복장, 그 얼굴을 하고 절 찾은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거니까요.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얼마나 힘들고 아팠으면 그런 상태로 절 찾아왔겠습니까. 그 선수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지금 조용히 야구장을 빠져 나가 사우나 가서 땀을 빼고 집에 가서 잠을 푹 잔 다음 내일 아침에 다시 나와서 워밍업하고 훈련에 참가한다면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하겠다고요. 그래도 그만두고 싶다면 내일 이 상태로 해서 다시 찾아오라고. 그럼 감독님한테 정식으로 보고하겠다고요.”



<고양원더스 투수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이상훈. 그는 간절함을 내세우는 선수들에게 따뜻한 조언과 지도를 아끼지 않는 코치였다.(사진=고양원더스 SNS)>



다음날 그 선수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하네요.


“저도 궁금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코치실에서 훈련 준비를 하는데 그 선수가 오지 않더라고요. 순간 그 선수가 아예 안 나온 줄 알았어요. 전날 감독님한테 보고도 하지 않고 선수를 집으로 돌려보낸 터라 모든 책임은 저한테 있는 거잖아요. 불안한 마음으로 야구장에 나갔더니 훈련을 준비하는 선수들 틈에서 스트레칭하고 있는 그 친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았어요. 눈빛 교환만 한 번 한 다음 그냥 지나쳤습니다. 전 그 선수에게 기회를 준 게 아니라 시간을 준 거였어요. 나이 어린 선수들이 이리저리 치이고 밟히면서 원더스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실망과 좌절을 맛봤겠습니까. 해도 해도 안 되고, 희망도 안 보이니까 결국에는 마지막 선택을 한 거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볼 시간을 주고 싶었습니다.”


‘기회가 아니라 시간을 주는 것이다’라는 말에 공감이 됩니다. 새벽까지 술을 먹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코치실 방문을 노크하기까지 선수의 심경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고요.


“그걸 알기 때문에 다시 돌려보낸 겁니다. 야구 그만두겠다고 찾아오는 선수들한테는 꼭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말하고선 돌려보냈어요. 그러면 모든 선수들이 다음날 사복이 아닌 유니폼을 입고 훈련장에 나가 있었고요. 제가 선수들에게 전한 건 마음이었습니다. ‘그래, 힘들지? 나도 너 힘든 거 알아. 이해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만두면 안 되잖아. 다시 힘내보자’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고요. 한 번은 훈련 앞둔 아침에 또 다시 누군가가 코치실 문을 두드렸어요. 들어오는 선수의 모습을 보니 이번에는 술도 안 마셨고, 사복이 아닌 유니폼을 입고 있더라고요.”


이번에는 무슨 일이었을까요?


“그 친구한테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왜 온 거야? 너도 그만두게?’라고요. 그랬더니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코치실이 있는 2층에서 잠깐 1층으로 내려가자고 하더라고요. 1층으로 내려가면 불펜이 있는데 그 불펜으로 저를 이끌었어요. 불펜 문을 열고 들어서니 투수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한 선수가 케이크에 불을 붙여 놓고선 우리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그 날이 제 생일이었거든요.”


길게 설명을 이어가던 이상훈이 잠시 호흡을 고르느라 이야기를 중단했다.


“생일 축하 노래가 들리고 여기저기서 ‘코치님, 생신 축하드립니다’하고 인사를 건네고…. 그때 정말 오랜만에 감격이란 걸 맛봤어요. ‘아, 내가 그래도 잘 살았구나’하는 생각도 들고.”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네요. 표정이 한층 밝아졌어요.


“뭐랄까. 지도자로서의 보람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이었습니다. 원더스 선수들은 프로 선수들과는 환경이 다르잖아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야구하고 있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기 까지 ‘인내’를 품고 살아야 하는 운명 속에서 간절함을 공유하며 더 끈적끈적해지는 감정들이 있어요. 그걸 그 자리에서 다시 확인했던 것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양 원더스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2014년 9월의 일이었어요. 


“9월에 해체 발표를 했지만 11월까지는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거든요. 또 그때까지 남아서 훈련하겠다는 선수들이 있어서 저도 11월까지 남았습니다.”


이미 10월 말 즈음에 두산 베어스 투수 코치로 선임됐다고 알려졌는데 이후에도 계속 원더스에 남았던 거군요.


“약속이었으니까요. 그 부분은 두산 측에도 양해를 구했습니다. 갈 곳 없는 선수들이 11월까지 남아서 훈련하고 있는데 선수를 두고 코치가 먼저 팀을 떠날 수는 없잖아요. 그중에는 프로팀을 찾아가 테스트 받으려고 준비하는 선수들도 있었고요. 덕분에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김경문 감독님이랑요.”





김경문 감독이요? 고양 원더스와 김경문 감독이랑 어떤 인연이 있는 거죠?


“저랑 함께 했던 선수가 NC 다이노스에 가서 테스트를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테스트 날짜만 알고 무작정 창원으로 향한다는 선수를 보며 자꾸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 친구는 테스트에 대해 희망을 갖고 있는 건데 과연 프로팀에서 독립구단에서 온 선수에게 눈길이나 줄까 싶었던 거죠. 고민 끝에 김경문 감독님 연락처를 수소문했습니다. 몇 단계를 거친 끝에 감독님 전화번호를 받게 됐어요. 전화를 드렸더니 바로 받으시더라고요.”


이상훈이 설명한김경문 감독과의 통화 내용을 재구성했다.


“김경문 감독님이시죠?”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저 이상훈이라고 합니다.”


“어어, 그래, 상훈아! 네가 웬일이야?”


“감독님, 정말 죄송한 말씀 좀 드리려고 합니다. 내일 NC에서 테스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원더스에 있던 선수가 테스트를 보러 간다고 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단 한 번만 그 친구하는 걸 봐주셨으면 합니다. 테스트 합격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 선수한테는 감독님이 한 번 봐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딱 한 번만 그 녀석이 하는 걸 봐주셨으면 해서요. 이건 절대 청탁이 아닙니다. 순수한 부탁입니다. 제가 그 선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어서 전화드렸습니다.”


“그래, 그게 뭐 어렵다고. 야, 그런데 다른 건 또 없어?”


“네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이런 부탁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선수의 간절함이 너무 안타까워서 저도 용기를 내 전화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선수는 어떻게 됐나요?


“테스트에 통과는 됐는데 이후 2군에서 활약하다 2,3년 지나 은퇴했어요. 2군에서는 경기에 많이 출전했더라고요. 1군 무대를 밟지는 못했지만 2군에서 좋은 경험을 안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전 그때 김경문 감독님과의 전화 통화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전화는 정말 어려운 전화였거든요. 감독님과는 그 후로도 따로 뵐 수는 없었지만 시즌 마치면 항상 문자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정말 감사했다고요.”



<겨울에 눈을 치워가면서 훈련했던 고양 원더스. 이제는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사진=고양원더스의 SNS)>


 


출처 :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80&aid=000000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