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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서의 스윙맨] 굿바이 원더스, 굿모닝 김성근

개살구 2015. 2. 11. 17:23

[일간스포츠 이상서]





SK 와이번스의 2군 경기가 열리는 송도 LNG구장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먼저 송도신도시 초입인 동막역에 도착한다. 여기서 구장 인근에 위치한 사설 스포츠센터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탄다. 30분에 한 대만 다니는 버스이니 타이밍이 어긋나면 한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 주의. 그렇게 종점까지 간다. 내려서 바다 옆길로 난 길을 쭉 따라 한참을 걷고 나면 그제야 야구장이 나온다. 도착한다고 끝이 아니다. 인근 쓰레기매립장에서 풍겨오는 악취까지 감내해야 한다. 아무리 2군 경기지만 관중이 많을 턱이 없다. 


그래도 이런 악조건을 이기고 한 구단과의 경기가 열리면 제법 사람이 모인다. 함성도 지르고 북소리도 둥둥 울린다. 바로 김성근의 고양 원더스다. 야신이 인천을 떠난지 근 4년, 인천팬들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그와 보낸 황금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작년엔 김성근의 팬들에게 희소식과 비극이 동시에 전해진 해였다. 원더스 해체로 더 이상 그를 LNG구장에서 볼 수 없지만, 한화 감독으로 돌아온 인천예수를 문학구장에서 영접할 수 있게 됐다. 2014년 한해 야구판 화제의 중심에 섰던 김성근 감독의 1년을 되짚어 봤다.


▲원더스의 역사는 곧 김성근의 역사였다




봄이 오고 야구도 기지개를 켜던 3월, 고양 원더스는 또 한 번 도약을 준비 했다. 당시까지 17명의 선수들을 프로에 보낸 원더스는 외국인선수까지 그런 가능성에 포함시킨 것이다. 특히 재작년 입단한 루이스 곤잘레스(32)와 오시리스 마토스(31)는 기량이 향상된 데다 희소성까지 지녀 언제든 국내 프로야구에서 뛰어도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남미 도미니카의 순수함과 낙천성을 보이며 코칭스태프의 지도를 잘 받아들이는 등 한국문화에도 잘 적응했다. 무엇보다 저렴하게 영입할 수 있다. 


김성근 감독은 “외국인선수들이 팀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치러야 할 경기가 90게임이다 보니 생각 좀 해봐야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면서 “원더스의 꿈은 글로벌 사관학교다. 재기를 노리는 선수는 외국인이든 국내선수든 언제든 환영하며, 그들이 원더스를 발판으로 프로에서 성공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열정에게 기회를’이란 구단 슬로건을 가진 원더스는 기회의 자격을 피부색이 아닌 노력에 둔 것이다.


이어 6월 20일 왼손투수 최현정(22)이 20일 KIA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대전고를 졸업하던 201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 9번으로 두산에 입단했으나 다음 해 방출됐으며, 2013년 넥센에 신고선수로 문을 두드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현정의 KIA 입단에는 김성근 감독의 추천이 있었다고 알려졌다. 김성근 감독은 당시 ‘원더스 소속 토종 투수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자랑을 했다. 최현정은 원더스에서 프로 입단 꿈을 실현한 통산 20번째이자 2014년도의 3번째 선수다.


불과 열흘 후인 7월 2일 이용욱이 삼성 라이온스에 입단했고, 같은 달 24일 외야수 김진곤이 신생팀 kt에 입단했다. 원더스의 시즌 5번째이자 통산 22번째 프로 선수였다. 이렇게 2014년에만 원더스는 해체 전까지 5명, 해체 후 이병용과 안형권 두 선수를 롯데에, 김선민을 kt에, 이어 신정윤, 정유철, 채기영을 입단 테스트를 통해 김성근의 한화로 보냈다. 총 12명. 원더스의 마지막 시즌에 가장 많은 선수가 프로에 입단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웃펐(웃기고도 슬펐)’다. 


▲김성근의 쓴소리 바른 소리


독립구단 고양원더스의 마무리훈련이 서귀포 강창학구장에서 열렸다. 김성근 감독이 외야 펑고를 쳐주고있다.



김성근 감독은 눈치 안 보고 야구계에 쓴소리를 하기로 유명하다. 책으로 펴내도 몇 권은 됨직한 그의 2014년도 독설 가운데 몇 개를 추렸다.


“프로는, 리더는 불가능, 부족함, 불만 속에서 목표를 향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반드시 결과를 내야 되는 사명감이 필요하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없는 속에 이기는 감동을 추구하는 진정한 모습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프로의식은 비록 프로야구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다 적용된다. 다만 현역 선수 중에 ‘완벽하게 프로의식을 갖춘 선수가 몇이나 될 지’ 생각하니 아쉬움이 크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먼저 프로가 돼라”는 말이다.”


“(지금의 프로야구가) 보다 큰 그림을 그리지 않고 현 상태에 만족하면 언제 사라질 지 모른다. 흔해 빠진 마케팅 전략에 의존하고, B급 외국인선수 데려오기, A급 국내선수 빼앗기기 등 국내리그에 테두리에 머무르면 관중 축소, 인기하락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선수 제한을 둔 상태에서 스타 선수들의 해외진출이 계속된다면 경기의 질적인 문제를 비롯해 우려하는 사태가 일찍 올 수도 있다. 당장 일본 프로야구만 해도 프로야구 시청률이 15~20%에서 5% 안팎으로 떨어졌다. 한국 프로야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선수의 프로의식 못지 않게 프런트의 프로의식이 요구된다. 선수와 코칭스태프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진정한 프로를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그러나 프런트는 출범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더디다. 아직도 모기업에 손을 내밀지 않으면 운영을 하지 못할 정도다.”


“(LG가 강팀이 되려면) 마인드가 바뀌어야 한다. 선수 뿐 아니라 구단 코칭스태프 모두가 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해야 한다. 현재의 모습은 집중력이 없는 것이 눈에 띈다. 모두가 작년 2등한 것에 만족했다. 왜 2등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느냐고 의문을 갖고 새 출발했어야 했는데…. 그런데 시즌 후 노장들이 모두 안주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야신의 후예들이 간다


2011년 5월 18일 오후 인천문학구장에서 열린 SK와이번스와 롯데자이언츠의 경기에서 승리한 김성근 감독이 경기 후 오랜만에 출전한 박경완의 손을 잡고 있다.



야신은 제자를 훈육하고, 제자들은 또 그를 추억한다. 13번이나 팀을 옮긴 그의 씁쓸한 이력은 되레 넓은 인적 지형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수많은 김성근의 ‘아이들(그는 선수들을 이렇게 부른다)’ 중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이는 누굴까. ‘돌격대’ 쌍방울 시절과 SK의 황금 시절을 동고동락한 박경완이 아닐까 싶다. “SK 전력의 반은 박경완”이라고 김 감독이 입버릇처럼 말한 주인공이 작년 5월 은퇴식을 가졌다. 진한 추억을 공유한 제자의 떠나는 모습을 본 김 감독의 소감은 어땠을까.


“음... 박경완 하면 늘 다그쳤던 일이 생각난다. 그것도 잘했을 때 더 몰아부쳤다. 불만을 가질만 한데도 경완이는 군소리 없이 다 받아들였다. 열심히 한만큼 결과를 얻어내지 않았나 싶다.”


SK 왕조의 안방엔 박경완만 있던 게 아니다. 2009년과 2011년 박경완이 부상으로 신음할 때 대신 버텨주던 두 포수가 있었으니, 바로 정상호와 이재원이다. 이중 작년 리그 정상급 타자로 성장한 이재원은 여전히 은사를 소회한다. 김 감독을 향한 약간의 투정(?) 섞인 추억담이다.


“야구했던 기억 밖에 없어요. 쉬어 본 적이 없네요. 김성근 감독님과 하면서 20~26살까지 놀아 본 기억이 없어요. 오로지 야구만 했죠. 제가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부족함을 아쉬워 할 겨를도 없이 매일 운동만 했어요. 하루는 운동 끝나고 여자 친구랑 밥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연습하러 오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밥 먹다 말고 여자 친구 놔두고 운동하러 간 적도 있어요.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내가 스무 살 때는 뭐했지?' 그런데 생각하니 연습했던 기억 밖에 없어요…(중략)…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감사하죠.”



정확한 발음을 낼 수 없는 박병우는 어려운 단어의 경우 종이에 썼다. 그 중 하나가 ‘삼자범퇴’ 였다. 기록 중에 투수로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가 쓴 네 글자 였다. 삼진이나 평균자책점, 완봉승 보다 세명을 돌려세우며 간단히 이닝을 종료시키는 투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야신의 또 다른 아픈 손가락인 원더스 선수들의 얘기도 들어보자.


청각장애라는 아픔을 딛고 도전해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박병우는 “김성근 감독님은 조금 무서운것이 사실이지만 항상 예의바르게 인사하기 때문에 크게 혼나 본 경험은 없다”며 “존경하는 분이다”라고 회상했다.


원더스 출신 중 최고의 슈퍼스타를 꼽으라면 단연 LG 트윈스의 황목치승일 것이다. 이 신데렐라는 경기를 치를수록 한 단계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빠르게 LG팬의 가슴 속을 파고 들어갔다. 7월 29일 대구 삼성전에서 데뷔 첫 안타와 타점을 기록한 데 이어 넥센과 잠실 3연전에선 10타수 5안타를 쳤다. 황목치승은 프로 첫 안타를 치고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는 "감독님이 '지금처럼 하면 잘 될 것'이라고 격려해주셨다"고 말했다.


2013년 6월까지 원더스에서 뛰며 도약을 노리던 이승재 역시 애틋했다. 고향팀 NC 다이노스에 입단한 이승재는 대구 삼성전에서 9회 마무리 임창용을 상대로 3타점 3루타를 치면서 무려 8년 만에 안타와 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그때 제일 먼저 김성근 감독님께 전화드렸다”며 “‘잘 했다. 열심히 해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더이상 열정에게 기회를 주지 못했지만…


원더스 명예의 전당. 더 많은 란을 채울 수도 있었지만, 원더스의 야구는 여기까지였다



한국야구대표팀이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야구의 날이 8월 23일이라면, 9월 11일은 한국야구의 슬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제정되어야 한다. 고양 원더스는 보도자료를 통해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는 2014년 시즌을 끝으로 여기서 도전을 멈추고자 한다"며 "구단을 3년간 운영하면서 창단을 제의했던 KBO(한국야구위원회)와 구단 운영에 대한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했다"고 해체 결정의 이유를 설명했다. 


원더스는 2011년 9월15일 창단을 선언하고 김성근 감독을 영입한 뒤 그해 12월 국내 최초 독립구단으로 본격 출범했다. 2012년부터 작년까지 퓨처스리그에 교류 팀으로 합류해 통산 90승25무61패를 기록했다. 김 감독과 원더스 측은 줄곧 퓨처스리그 합류를 희망했다. 정규 편성을 통해 안정적인 경기 수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KBO 측은 '어렵다'는 답변을 내놓을 뿐이었다. 결국 허민 구단주는 미래 불확실성 속에서는 구단을 운영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원더스 측은 김성근 원더스 감독에게는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다. 원더스는 "(감독님께) 연락을 드리려고 해도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며 "원더스 선수들에게도 더 연락을 해야겠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힘이 되어주고 싶은데"라고 안타까워했다.


김 감독은 자신의 안위보다 선수들 걱정이 컸다. "나는 리틀야구, 아마야구 어디든 괜찮다. 그러나 선수들이 불쌍하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 아닌가. 문제는 당사자끼리 헤어진 게 아니다. 13번째 해고이지만, 팀 자체가 없어진 건 처음이다. 마음이 아프다."


▲일흔두 살 노감독을 품을 구단은


김성근 감독이 작년 10월 28일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했다. 김 감독이 한화 유니폼을 입고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 김 감독은 한화와 3년간 총액 20억원(계약금 5억원, 연봉5억원)에 계약을 채결해 10개구단 최고령 감독으로 프로야구 무대로 컴백했다. 한화는 김성근 감독이 맡게 된 7번째 프로구단이다.



원더스 해체 소식과 동시에 김 감독은 하마평에 올랐다. 유달리 사령탑 물갈이가 잦았던 그해 가을이었기에 더 그랬다. 


일찍이 LG는 5월경 물러난 김기태 감독의 후임으로 후보군 중에는 김성근 감독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백순길 LG 단장이 직접 김성근 감독을 만나 영입 의사를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감독은 이 자리에서 "김기태 감독은 내 제자다. 시즌이 끝나고 갈 수는 있지만 지금 옮기는 것은 힘들다"고 했다 한다. 2012년 한화가 시즌 도중 김성근 감독을 데려오려 했을 때도 그는 한대화 감독이 제자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 의사를 밝혔었다. 


신생 구단부터, 감독이 해임된 구단, 계약 만료된 구단까지 야신 쟁탈전은 과열양상을 보였다. 이에 김 감독은 “솔직히 말한다. 아무 곳도 접촉하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다. 소문이 무성하면 아무 것도 얻는 건 없다”라고 뜬소문을 일축했다.


김성근 감독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된 구단은 최하위 한화였다. 특히 ‘보살’ 한화 팬들이 나서 구단 게시판 등에 '김성근 감독 영입'을 큰 목소리로 주장하고 있다. 암흑기를 보내고 있는 한화에 커다란 충격요법이 필요하고, 김 감독이 적임자라는 반응이다. 유망주들이 넘치고 투수진이 허약한 한화에는 기초부터 엄청난 훈련량을 강조하고 투수 조련에 남다른 노하우를 지닌 김성근 감독이 적격이라는 얘기다. 그런 소요 사태 이후 10월 25일, 한화가 '야신'을 품었다.


한화 이글스는 팀의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위해 제 10대 감독으로 김성근 감독을 선임하고, 3년간 총액 20억원(계약금 5억원, 연봉 5억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신 한화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성원해 주신 팬들에게도 고맙다. 많은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한화를 명문 구단으로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소감을 밝혔다. 감독 취임식까지 찾은 80여 명의 보살팬들은 “당신이기에 행복합니다”라는 글이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실제로 한화가 야신을 품기까지 팬들의 역할이 컸다. 팬들이 제작한 ‘김성근 감독 청원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11만건을 넘겼다. "우리는 한화 이글스 팬입니다. 우리는 이글스를 사랑합니다. 때로는 보살이라 놀림 받고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훨씬 더 많지만 우리는 또 응원합니다" 팬들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또 한화 그룹 본사 앞에선 1인 시위도 이어졌다.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청원까지 실시했다. 그만큼 김성근 감독을 향한 팬들의 사랑은 컸다.


▲스프링캠프 기사 지분의 7할을 차지한 한화의 지옥훈련


한화 스프링캠프의 최대 성과(?) ‘정근우 산란기’ 짤 



야신이 취임식에서 “김태균은 당분간 3루에서 반 죽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이어 주요 포털의 야구 페이지는 한화 선수들이 나뒹구는 모습으로 도배가 됐고, 그들의 고통에 비례해 한화팬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관심받던 때가 언제였더냐!’


그 사이 선수협과의 마찰은 언급하지 않겠다. 단체훈련 금지기간에 잠시 숨을 돌린 한화는 1월이 되자 다시 굴렀다. ‘정근우 산란기’란 역사에 남을 짤과 홀쭉해진 김태균의 모습을 남긴 한화의 스토브리그는 올해를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행복합니다. 한화라서 행복합니다”라는 대전구장에 울려퍼지는 그들의 응원가는 더이상 조롱의 의미로 소구되지 않을지 모른다.


참고로 한화의 문학 원정 첫 경기는 5월 19일(화)이다. 2011년 8월 18일, 김성근 감독이 SK에서 경질된 이후 꼭 1369일 만이다. 님이 떠나던 그때, 문학구장에 국화꽃을 흩뿌리던 팬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를 맞이할까. 



2011년 8월 23일 인천문학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에서 김성근 감독 경질에 항의하는 SK팬들이 국화꽃을 준비한 채 경기를 기다리고 있다.



출처 :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241&article_id=0002329820&redirect=false&redirect=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