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원더스 김성근 감독(70)은 “이제야 편안해졌다”고 했다. 시험을 치른 뒤의 홀가분함이랄까. 김 감독은 갈등의 미로를 지나 다시 한 곳을 보고 뛰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웠던 지난 시간도 이젠 여유롭게 되돌아볼 수 있게 됐다.
지난 2일에는 경기도 고양의 원더스 홈구장에서 두산 2군과 교류전을 벌였다. 3-0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3-3으로 끝난 경기. 김 감독은 프로 사령탑으로 정점에서 승부를 벌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투수 교체 타이밍을 아쉬워했다. 대화는 꼬리를 물었다. 이 자리를 지키게 한 선택의 순간으로 시간을 돌렸다.
■“프로에 복귀해 흐름 바꾸고 싶었다”
김 감독은 원더스 카드를 잡았다. 한대화 감독이 한화 사령탑에서 경질된 시점을 전후로 그의 프로 복귀설은 야구계 최고 핫이슈였지만 그 가능성을 스스로 잠재웠다.
프로 복귀를 놓고 일찌감치 선을 그어둔 것은 아니었다. 김 감독은 올시즌 프로야구를 지켜보며 복귀 열망이 꽤 있었다고 밝혔다. 프로야구 흐름을 보며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외인부대 쌍방울 지휘봉을 잡은 1996년 얘기를 꺼냈다.
“그 때 즈음 우리나라 프로야구 흐름을 보면 자율야구라 하여 훈련이 줄어갈 때였어요. 내가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쌍방울 가서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번에도 프로야구를 보니 관중은 늘었는데 내용적으로는 뭔가 위기감 속에 있더라고요. 프로에서 뭔가 해야할 것이 있겠다 싶었어요. 다시 젊은 감독들하고 승부도 하고 그 속에서 마지막으로 젊은 감독들에게 방향 제시를 하고 싶었어요.”
김 감독은 올해 프로야구를 ‘보이는 힘의 싸움’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진단했다. ‘보이지 않는 힘’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야구로 얘기하면 흥미있는 부분이 줄어든 것 같아요. ‘보이는 힘’만 남고 ‘보이지 않는 힘의 대결’은 없어졌다고 할까.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하면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또 벤치의 경험과 판단 같은 것이고 그런 것들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데 그런게 부족하지 않나 싶어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올해 프로야구는 방망이 잘 치면 이기고, 못치면 지고 그런 느낌도 들었어요.”
김 감독은 끝내 놓아버린 카드를 재정리했다. “얼마 전까지 젊은 감독들과 승부하며 무언의 어드바이스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기회가 사라진 게 나로서는 무지 섭섭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보면 편안하고 다시 창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화 감독 중도 경질 없었다면…”
김 감독이 프로 복귀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린 것은 한화 감독 중도 경질 때문이었다. 한화 감독의 하차 발표와 함께 김 감독도 원더스 잔류를 확정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갔을 때 당장 이 팀(원더스)의 존재는 어떻게 되나 그게 걱정이 됐죠. 또 다른 것이 한대화 감독이 시즌 종료 전에 그만두게 됐다는건데 그게 나로서는 굉장히 쇼킹했어요. 한화로 가게 된다면 그걸 떠안고 간다는 게 무지 부담스러웠어요.”
한화가 한 감독의 계약기간을 지켰다면 어땠을까. 김 감독은 “시즌 끝난 다음이었다면 아마도 깊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며 “한대화 감독이 나간 뒤로 내가 남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선택을 앞당긴 또 하나는 지난 여름 이후 야구계에 떠돌던 소문이다. 한화가 김 감독 영입을 전제로 김 감독 전 소속 구단인 SK에 조언을 구했다는 얘기다. 그 소문을 전해듣고 불쾌감을 갖고 있던 김 감독은 한 감독 경질 사태를 계기로 진로를 결정했다. ‘신의’와 연관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원더스 잔류를 스스로 다행스러워하기도 했다. 남아서 할 일이 산더미 같다.
김 감독은 “프로야구 저변확대를 위해 여기서 더 해야할 일이 많다. 지금으로서는 미완성 상태”라고 말했다. 화려한 빛이 쏟아지는 무대가 아닌 그림자 쪽에 서게 된 것을 두고는 “대한민국으로 처음 왔을 때부터 그랬다. 난 늘 어려운 길을 택했다. 그것이 나를 성장시켰고, 이번에도 나 스스로 성장할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1964년 12월을 떠올렸다. 아들을 붙잡기 위해 여권까지 숨긴 어머니를 뒤로 하고 야구만을 바라보며 한국으로 날아온 그 날의 얘기를 이번 결정과 오버랩시켰다.
■“선수보다 팬이 절실하다”
“지금 선수들을 보면 프로가 아니예요. 서커스 하는 사람이 줄에서 떨어졌으면 창피하구나, 내가 자격이 없구나, 관객을 실망시켰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야죠. 또 요리사가 칼로 재료를 썰다가 손을 다친다면 창피하구나, 그런 마음을 먹어야죠. 요즘 보면 부끄러운 것 모르는 선수들이 너무 많아요.”
김 감독은 선수들의 절실함 부족을 안타까워했다. 늘어나는 관중과 팬들의 열망을 선수들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 감독은 지난 2일 원더스 구장을 찾아온 한 여성팬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여성팬은 지난 1일 문학 SK-두산전에서 9회초 2사후 SK 왼손투수 박희수가 두산 양의지에게 동점 솔로홈런을 맞은 장면을 녹화해 김 감독 앞에 내놓고 분석을 부탁했다.
“그 팬이 대뜸 묻기를 박희수 공이 왜 높이 들어왔나요, 그 얘기를 분석해달라 하더라고요. 요즘 그런 팬들이 꽤 늘었어요. 그런데 그런 만큼 선수들이 하고 있나, 모르겠어요. 오히려 팬들이 더 절실한 것 같아요. 그게 큰 문제입니다.”
■“야구 실업자 아직 배고픔 모른다”
김 감독이 지적한 절실함 부족 현상이 프로선수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김 감독은 프로행을 원하는 학생들 얘기를 꺼냈다. 향후 원더스 선수 스카우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대학생들 관련해 이야기 들어온 것을 보면 아직 아니더군요. 배가 부르더라고요. 프로 아니면 안간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던데 야구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 아닌가 싶어요. 프로구단 테스트를 받아도 우리한테는 안 오겠다고 그러던데, 그런 마음 때문에 실패한 것 아닌가 싶어요. 올해 200명 가까이 야구 실업자가 생긴다던데 그런 마음이라면 받을 생각도 없고…. 그런 마음을 먹은 아이들이라면 구제해야하나 싶기도 해요.”
김 감독은 원더스 선수 선발 작업도 더 세밀하게 펼치겠다고 했다. “프로구단처럼 스카우트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겨울에는 팀을 만들어야하니 선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 이번 달에 입단 테스트를 할 것이고 문도 열어놓겠지만 원더스 들어오는 게 어려워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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